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기 위해 영웅을 모았던 그들의 리더는 저주를 피하고 혼자 살아남았다. 붉은 로브를 펄럭이며 붉은 부츠로 땅에 발을 내디디며 자신의 동료들이 모두 잠들어버린 그 시간 속에서 혼자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마법사가 봉인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 아카이럼이 내게 말했었다. “그를 감시하라.” 그가 나에게 주었던 일 중 가장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은 프리드, 그가 하는 일은 무척이나 지루한 일이었다. 그는 커다란 알을 어딘가에 숨긴 후 자신과 함께 대륙을 넘어온 이들과 헤어진 후 다시 길을 떠났다. 저런 녀석이 검은 마법사를 봉인했던 5명의 영웅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믿어지질 않는다. 아카이럼에게서 시간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녀석이라곤 들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약해빠진 마법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기요, 모험가님.”
그가 후드 모자를 벗으며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나 그의 주변에나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저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저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당신을요.”
그가 뒤를 돌며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들켰다. 그는 내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몸을 움직여 내 쪽으로 조금씩 다가온다. 그의 눈동자는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쳐다본 것은 처음이다.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귀에 꽂혔다.
“…마족?”
그의 한 마디에 홀릴 것 같았던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나와 근접한 거리에 서 있던 그를 급하게 밀쳐내고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연약하게만 보였던 그는 주변의 경계가 심하며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인기척 정도는 쉽게 눈치채는 사람이었다. 약해빠진 마법사로만 보인다는 말은 취소다. 그는 내가 이미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능청스럽게 뒤를 밟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카이럼이 나를 불렀다.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며 그에게 갔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카이럼은 시간에 가둬놓은 그를 보며 나에게 말했다.
“그는 그분의 봉인이 풀릴 때를 대비해 귀찮은 물건을 남길 것이다.
허나, 그를 이대로 죽이기엔 너무도 아까운 인재지.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네, 그분의 봉인이 풀린 후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자고 말이지.”
나는 아카이럼의 말을 한 귀를 흘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나를 똑바로 쳐다봤던 그 푸른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굳게 닫혀버린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아카이럼이 자리를 비운 이후에도 계속 잠들어있는 그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프리드.” 아카이럼에게서 들었던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시간 속에 갇혀있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너무나 눈이 부신다. 깨끗하고 청렴하고, 고결한 사람이다. 나락의 끝으로 떨어져 더 이상 깨끗해질 수도 없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무척이나 순결한 사람이었다. 형의 뒤를 밟을 때에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세계수를 깨울 때에도 마음 한구석은 그의 곁에 남아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는 거야?”
힘의 회복을 위해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세계수가 나에게 물었다. “신경 꺼.”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뱉지만 세계수는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숨기려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세계수의 눈빛은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 꼬맹이 같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다 루타비스를 빠져나왔다. 세계수를 푸른 눈동자를 계속 보고 있으니 점점 프리드의 눈동자와 겹쳐 보였다.
검은 마법사는 순조롭게 봉인에서 깨어났고 아카이럼에 의해 정지되어 있던 프리드의 시간도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년 전의 세상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서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눈을 떴다. “오랜만이군, 프리드.” 아카이럼이 턱을 만지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눈을 깜박이던 프리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신전을 훑더니 아카이럼과 내게 시선을 옮겼다. “…아카이럼.” 그는 또박또박 한자씩 내뱉으며 아카이럼의 이름을 불렀다. 프리드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프리드는 질색하는 눈빛으로 아카이럼을 노려보더니 내 쪽으로 눈을 흘긴다. 경멸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며 나를 심해 속으로 빠트린다.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그분께 자네의 손을 빌려주지 않겠나.
자네라면 아주 좋은 조력자가 될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네.”
“…나는 나의 후계자와 내 친구들에게 미래를 맡겼어.
이곳은 내가 개입할 세상이 아니야.
그리고 검은 마법사와 손을 잡는 것은 더욱 사양이야.
거절하겠어.”
또렷한 그의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올곧은 신념은 꺾이지 않으며 적의 소굴 속에 들어온 그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긍정적인 대답을 바랐는데 아쉽게 되었군. 자네와 함께 할 수 없어 아주 아쉬워.” 능청맞은 미소를 지으며 아카이럼이 말했다. 프리드는 그렇게 거울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프리드가 아카이럼의 뜻대로 따르지 않으니 신의 아이처럼 그를 세뇌시킬 속셈이다.
아카이럼의 눈을 피해 윌을 방으로 들어왔다. ‘프리드를 만나고 싶어.’ 그 한 마디가 나를 이곳까지 끌어당긴 것 같았다. “당신이 제 방엔 무슨 일이시죠?” 윌의 음성이 뒤쪽에서 들려왔다. 자신의 방문에 기대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방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에게 자신의 방에 들어온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아마 물을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겠지. 그 편이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이며 그에게 변명을 해야 하는 것보단 낫다. 윌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손을 거들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하며 나를 거울 세계로 향하는 포탈로 이끌었다. 그는 나에게 캡슐 약이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몇 주정도 그가 이 세계에 의심 없이 발을 붙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한 마디를 하며 거울 세계를 감시하는 모니터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메이플 월드의 리프레와 똑같이 생긴 장소, 거울 세계의 리프레에서 무언가 연구를 하고 있는 프리드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윌은 능청맞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은 ‘나를 떠본다.’라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어찌 되었던 상관없었다. 그저 프리드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변명거리가 생긴 셈이니 오히려 나에겐 감사할 일이었다. 그래도 그가 나를 꿰뚫어보지 못하도록 최대한 내색을 해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을 들켜선 안된다.
“어쩔 수 없군, 나 역시 신의 아이에게 볼 일이 있으니.
그것을 조건으로 손을 빌려주지.”
“…감사합니다, 데미안.”
거울 세계 속 리프레는 메이플 월드의 리프레 무척이나 닮았다. 하지만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데미안, 무슨 생각하고 있어?” 어린 하프링족들과 앞서가던 프리드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두드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에 프리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음, 그렇다면 묻지 않을게.”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선 다시 나와의 거리를 넓힌다. 프리드의 뒷모습을 보고선 슬쩍 주머니 안에서 캡슐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내었다. 처음 윌에게 받았던 그대로 가득 차있는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프리드에게 이 약을 먹이지 않았다.
「이 세계에 순순히 붙잡혀 있을게.
그러니 친구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없애지 말아줘.
나에겐 이게 전부야.
부탁할게, 군단장.」
나는 프리드의 눈빛을 보고서 이 약을 줄 수 없었다. 유리병을 다시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서 서둘러 하프링족의 아이들과 프리드의 뒤를 따랐다. 프리드는 가끔 나에게 자신의 동료들에 대해 물었다. 아는 것이 없는 나는 당연히 ‘모른다.’라는 답만 반복했고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프리드는 조금 아쉽다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프리드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프리드의 순결함이 닿을 때마다 여럿의 피를 묻힌 내 손은 한없이 더러워 보인다.
그는 여전히 순결했고 나는 여전히 불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