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대 AU / 프리드=은월=18세(고2)
" 일단 이 문제는 13번이 나와서 풀어봐. 다음 문제는 23번이 나와서 풀고. "
수학 선생의 수업은 지루하고 진부하기 짝이없었다.그저 학생에게 질문을 하는 선생과 그 질문에 답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수업이었으며학생이 답을 제대로 내지 못하면 그 학생을 질책하고 제대로 답을 낸다면 그냥 넘어가는 식의 수업이었다.
그렇다고 수학선생이 엄청난 명강의를 하는 건 절대 아니였다. 오히려 저 선생의 수업은 한두번 들으면 이해 할 내용을 이해 할 수 없게 만드는 수업이었고, 그런 영양가 없는 수업을 하는 수학 선생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건 당연했다.
난 작년에도 저 선생의 수업을 들었었는데, 저 선생은 다른 선생의 수업이라면 한번쯤은 웃고 넘어갈 가벼운 농담 따윈 일체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건, 8월에는 저 수학 선생이 정년퇴임을 하므로 8월 이후에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것이다.
눈의 초점이 흐려질 정도로 지루해진 수업시간을 어떻게든 넘기기 위해 노트를 펼쳤다. 원래는 수학노트로 사용되었어야 할 노트였지만 노트의 귀퉁인 대부분 잡다한 낙서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써갈긴 말들로 채워져있었다.
대체 누가 저런 수업 내용을 필기하겠는가?
루미너스나 프리드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천천히 노트 귀퉁이에 그려나갔다. 손에 쥐여진 제도샤프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내 머릿속에 들어 차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노트에 형상화 시켜주었고, 노트는 상냥하게도 그것들을 잘 받아주었다.
낙서를 하기위해 여러 생각을 하다보면 주로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교문을 지나던 나를 잡아세우고는 다짜고짜 넥타이가 없으니 복장 불량이라고 지적한 선도부장 메르세데스, 그리고 루미너스의 미술책을 빼앗아 달아나던 팬텀과 그런 팬텀을 잡아 죽일듯한 루미너스.
둘의 추격전은 마치 먹히지 않기위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톰슨가젤과 샤냥을 하기 위해 그 뒤를 쫓는 사자와도 같았다.
다만 좀 다른 점이라면 그 둘은 동물이 아니며 잡아먹거나 잡아먹히거나 하는 관계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새 옷을 샀다고 자랑하던 옆집 유치원생 랑 이나 중학교 생활에 적응 중이라는 프리드의 동생 에반.
프리드.갑자기 프리드에 대한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왜 갑자기 프리드가 내 머릿속에 맴돌았던걸까. 그리고 난 왜 그것들을 홀린듯이 노트에 적어나간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노트에는 여러가지 말과 단어들이 적혀져있었고, 나는 내가 홀리듯이 적어나간 그 말과 단어들의 양이 상당하단 것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낙서처럼 적혀진것이 아니라 필기처럼 적혀져있있고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적어나갔던 말들과 단어들을 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사막과 모래, 바다와 심해....전부 프리드를 보고 느낀 것 들이었다.사막의 모래는 부드러운 금빛을 띈다. 프리드의 머리카락 또한 사막의 모래처럼 부드러운 금빛을 띄는 금발이었다. 부드럽고 푹신해 보이지만 발을 내딯으면 푹 하고 깊이 빠져버릴듯한 사막의 모래, 프리드의 머리도 그렇게 깊이 빠져버릴 것만 같은 숮이 많은 반곱슬이었다.바다, 청량함이 느껴지는 바다의 푸른 색을 띄는 프리드의 눈동자는 심해와도 같았다. 심해는 잔잔하다. 그리고 빠지면 다시는 나오기 힘들 정도로 깊다. 프리드의 눈도 마찬가지다. 그 푸른 눈동자는 그저 청량함만 느껴지는 것이 아닌 무언가 깊게 빠져버린, 마치 깊은 심해에 잠겨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고등학교 1학년. 프리드를 처음 만난 입학식 날.처음으로 프리드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본 날. 그날, 난 아주 깊은 심해에 빠졌다.난 그 전까진 소설에서 묘사되는 심해의 느낌은 작가가 주인공이 느낀 감정을 더 극대화 시키기 위해 넣은 표현이라고만 생각해왔다.여태까지 내가 책을 읽어오며 알아왔던 것들은 그저 사람들이 멋대로 해석한 이론에 불과했고, 작가는 그런 이론을 생각하며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는 그저 자신이 느낀 것들을 그대로 옮겨 적었던 것이였다.내가 프리드를 보면서 느낀 심해는 아주 깊고 잔잔하며 고요했다. 왠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 심해는 날 더욱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빠지면 빠질 수록 헤어나오지 못할, 그런 느낌이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가라앉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까. 가라앉다 보면 끝이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 끝에는 딱딱하고 차디찬 죽은바닥이 아닌 온기가 느껴지는, 생생히 살아있는, 시간이 흘러가는 네가 있으면 좋을텐데.그렇게 심해에 빠져있던 나는 얼마 지나지않아 현실로 끌려나와야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부른 그 누군가는 옆자리의 아란이였다.
아란은 지우개나 볼펜 같은 학용품을 던지며 나를 불러댔다.
그렇게 심해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내 눈 앞엔 수학교과서와 50센티는 되보이는 긴 플라스틱 자를 들고 내 자리로 걸어오고 있는 수학선생이 비쳤다. 위험을 감지했던 나는 황급히 노트를 덮어 수학책 밑에 깔았고 수학선생은 내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야 임마. 집중안하고 뭐하고 있어? 내가 나와서 문제 풀라고 출석번호를 몇번이고 불렀건만! 그렇게 정신 빼놓고 살면 말이다.... "아,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수학선생은 쓸데없이 긴,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설교를 운동장 까지 들릴 정도의 큰소리로 침을 튀겨가면서까지 열정적으로 늘어놓았다. 얼굴에 피가 쏠려 붉어진 얼굴을 한채 설교를 하는 수학 선생은 그야말로 ' 수학귀신 ' 그 자체였다. 책에서만 등장한 그 수학귀신이 진짜로 존재 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반면 수학 선생의 설교내용은 마치 로봇에 명령어를 입력한 뒤 그것을 그대로 출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로봇은 감정이 없어 저렇게 얼굴에 피가 쏠릴 정도로 흥분하며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네 정신력이 약해서 집중을 못한다느니, 정신 빼놓고 살지 말라느니...... 항상 이런 식이니 자기가 어떤 설교를 들을지는 대부분이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으며, 이 정도라면 토씨 하나 틀리지않고 그대로 선생앞에서 읊어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그렇게 그대로 10여분이 지나자 선생의 침 튀기는 설교가 끝이났고, 동시에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명랑한 기계음이 들렸다. 수학선생은 구둣발로 교실바닥을 쾅쾅 울리며 교과서와 그 긴 플라스틱 자를 들고 교실을 박차듯이 나가버렸다. 나는 그대로 의자에 앉고서 안도인지 짜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교실의 누군가가 부채질을 한 것은 아니였다. 부채질로는 그런 바람을 만들 수 없다는 건 나 조차도 아는 사실이었으며, 확실한건 교실의 그 누구도 부채를 갖고있지는 않았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열려진 창문 밖으로는 벚꽃잎들이 바람의 흐름을 따라 흩날리고 있었으나 난 그것을 여태까지 알아채지도, 알아챌 수도 없었다.
그 전까진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교실 안으로 운동장에 늘어진 벚나무의 향이 스며들어온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대로 나는 그 향기에 심취한 채 학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머지 2교시가 끝나고, 종례시간이 다가왔다. 담임은 교실에 들어와 전달사항을 말한 뒤, 출석부 담당에게 출석부를 맡기고는 발길을 돌려 교실을 나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종례가 끝났다. 전달사항을 따로 적어두지 않아 금방 잊어버릴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분명 회장인 데몬이 반톡에 공지로 올려 둘 것이다.
청소 당번들이 청소를 시작하자 마자 나는 가방을 매고는 교실을 뛰쳐나오듯이 곧장 프리드의 반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소당번들이 빗자루로 장난을 치거나 귀찮다는 듯이 대걸레를 대충 휘두르는 광경 뿐이었다.
여기 없다면 분명 도서관에 있을 것이다.
멈춰있던 발걸음은 방향을 틀어 계단을 타고 내려가 도서관을 향해갔다. 프리드는 도서부다. 도서부는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도서관 업무를 봐야하는데, 도서부원인 프리드도 예외는 아니다.
도서관 앞에 도착하자 내 손은 빠르게 빈 사물함을 찾아 열었고 가방을 벗어 던지듯이 넣어버리고는 도서관 문앞으로 다가갔다.
센서가 붉은 색으로 변하자 문이 열렸고 나는 문이 열리자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서가 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찾기 위해 서가로 들어갔다.
앞쪽인 100, 200, 300번대 서가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800번대, 문학서가 쪽에서 나는 소리일 것이다. 예상대로 문학서가 쪽에서 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책을 정리하는 소리였는데, 책을 정리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프리드였다.
프리드는 발판에 올라 높은 곳에 있는 책장을 보고있었다. 저렇게 하나하나 꼼꼼히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책들이 청구기호에 맞게 꽃아져 있는지를 보고있었으리라.
발판에 올랐어도 책장은 프리드에게 높았다. 고개를 치켜들고 책장을 바라보는 프리드는 무언가 위태위태 해보였다.
나는 프리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꼿꼿히 편 허리, 치켜든 고개.
휘청일 것만 같은 자세.
내가 다가가면 너는 꺾여진 꽃처럼 한순간에 쓰러져버리지 않을까.
나의 발소리가 들린걸까. 프리드는 책장을 올려다 보던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가, 나를 깊이 가라앉힐 것만 같은 심해가.
나를, 그안에 담고 있었다.
" 아, 은월. 어서와! 나 여기있단건 어떻게 알았어? "
" 너 도서부원이잖아. 집에 먼저가지는 않았을거 아냐. "
" 그래? 그럼 여태까지 기다렸던 거야? "
" 아니 아까 끝났어. "
" 은월, 잠깐만 기다릴 수 있어? 이쪽 서가만 정리하면 돼. 곧 끝날거야. "
프리드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프리드는 날 기다리게 할 때 마다 항상 미안해 해왔다.
너를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기다리고 싶지 않다면, 기다리는게 지친다면.
직접 찾아가면 되니까.
오늘도 너에게 하고 싶은 말 하나를 삼켰다.
오늘도 그 말 만큼, 나는 네 눈동자의 심해로 가라앉아간다.
" 나도 도와줄게. "
" 아냐, 도서부원은 나잖아. 괜찮아.... 아!! "
발판이 미끄러지며 프리드가 휘청였다.
" 프리드!!! "
나는 간신히 그를 받아냈고, 나와 프리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프리드의 어깨와 허리를 잡은 손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는 손에서만 느껴지는게 아니라 발끝부터 시작해서 머리 끝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온기는 서서히 미열로 변해가는 듯 했다.
" 괜찮아? "
" 괜찮아. 고마워 은월. "
" ......저 위쪽 정리하던거였나. "
" 아냐!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
프리드는 가장 위쪽의 책장에 있는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프리드의 손은 책에 닿을듯 했지만 닿지 않았다.
내 손은 그곳에 아주 쉽게 닿았다. 책을 빼내 프리드에게 넘겨 주었더니 프리드는 책을 제자리에 갖다놓고 왔다.
프리드에겐 높은 책장, 난 그곳에 닿을 수 있다.
하지만 프리드는 그 책장에 닿지 못한다.
나는 프리드에게 닿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가라앉아 갈 뿐이다.
" 이제 갈까? "
" 어, 가자."
프리드와 함께 학교 건물에서 나와보니 하늘은 남색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높은 곳에서 빛나던 해 대신 달이 은은하게 빛을 비추고 있었다. 학교와 정문을 이어주기 위해 나 있는 길다란 길에는 벚꽃잎이 가득 흩날리고 있었다.
" 은월. 이런 걸 보면 학교가 언덕 위에 있는 것도 괜찮지 않아? 다른 학교 처럼 밑에 있으면 이런 거 못볼테니까. "
" 그래, 이건 좋네. "
그렇게 잠시 눈 안에 들어온 풍경에 빠져있었다.
" ..... 은월 눈동자는 밤하늘 같네. "
" 무슨소리야. "
" 은월, 네 눈을 보고 있으면 밤하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보랏빛이 도는, 별이 흩뿌려져있는 것 같은 밤하늘. "
프리드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네 눈을 보면 밤하늘에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네가 내손을 잡고 우주로 가 줄것만 같아. "
" ...... "
" 원래 이런 낭만적인 풍경이 있으면 사람은 감성적이 되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 딱히 의미 둘 말은 아니니까. "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나와 너, 너와 나.
우리 둘만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선율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 때문일까, 아니면 은은한 달빛 때문일까.
아니면
내 앞에서 미소짓는 너 때문일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삼켜본다.
삼켜지지 않는다.
그 말들은, 너에게 하지 못했던, 닿지 못했던 말들은.
심해에서 나와 함께 가라앉아 있던 말들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너와 나, 우리 둘이서 우주로 갈까.
밤하늘을 거닐어 볼까.
시간을 멈춰 볼까.
아니면
이 말들을 전부 내 뱉을까.
나는 프리드의 손을 잡고 품안으로 끌어 들였다.
수면위로 올라온 말들이, 삼켰던 감정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 으...은월? 왜...갑자기...? "
목부터 귀까지 붉어진 프리드는 그 어떤 것 보다 사랑스러웠다. 나는 붉어진 프리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깊은 심해에서 빠져나온 나는.
현실의 너를 껴안고
그대로 다시 가라앉을래.
너와 함께 가라앉은 심해의 밑에는 밤하늘이 있어.
나는 너를 그 밤하늘로
데려가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