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조용함 속에서 눈을 떴다. 시간이 꽤 지난 듯 했음에도 어두움이 가라앉질 않기에 커튼이라도 쳐야할까…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서야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톡 톡 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 신발의 소리조차 무시한 채 꽤나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자색 벨벳 커튼을 확 걷어 젖혔다.
"……비가, 오는군."
언제부터 오기 시작한 걸까. 커튼을 걷어 젖히자 흐린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 빗방울이 창문을 톡 톡 쳤던, 언제부터 비가 내린 것 일까. 흐리멍덩한 눈으로 열지 않은 창밖을 보다가 활짝 창문을 열어버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열어버리는 이상한 습관 때문이었다. 비가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창문을 열어둔 채 무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창문을 열고 비가 오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는 날이면 이제 결혼을 앞둔 그녀가 감기 걸린다며 창문을 닫아주곤 했었는데. 이제는 오래된 책의 한 페이지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고갤 저었다.
"…참 많이도 오는구나. 이제는 창문을 닫아줄 사람도 없는데."
언제부턴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괜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여전히 비오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것도 잠시, 언제 타왔는지 모르는 커피가 들어있는 잔을 들고는 다시 창가에 서있었다. 김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 딱 봐도 식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서있는 창가도 찬기가 들어오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언제쯤 그칠까. 오늘따라 더 그리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식어버린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항상 결혼을 해버린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식어버려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반지케이스를 꺼냈다. 반지케이스를 열자 그녀에게 어울릴 것 같았던 심플한 반지가 있었다. 첫눈이 오는 겨울에 고백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은월은 입술을 깨물며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반지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은월은 그 날을 계속 떠올렸다. 얼음 같았던 자신의 감정을 녹여준 그녀의 결혼 상대가,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몇 번이고 계속 떠올렸다.
바보같이.
결혼식에 가지 못할 것 같아 편지를 썼다. 그리고 아란에게 전화를 해서 편지를 건네주었고, 그 편지를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아란을 쳐다보며 쓸쓸하게 웃어 보인 뒤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은 뒤 은월은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 열어둔 창문을 통해 아란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기다렸고, 아란이 보이지 않자 은월은 창문을 닫았다.
"…잘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은월이 살던 집 전체에 불이 붙었다.
**
프리드는 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애석하게도 결혼식 날에 비가 내려서 그런지 하객들이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친우들은 모두 신부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프리드의 결혼 상대는 검은 마법사, 집안 사정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이 결혼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친우들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더 이상 아무런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 아무 말 하지 말고 축하한다는 말만 하기로 암묵적인 룰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은 행복한 날이라는 팬텀의 의견도 있었다. 다들 은월이 프리드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프리드가 고백을 거절했다는 것 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프리드의 결혼식에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 같이 하고 있었다.
"………."
아란만 아무런 말이 없었고, 다른 이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혼식 시작 전이 되자 축하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식장으로 들어갔다. 아란은 편지를 줄까, 하다가 결국 편지를 전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신혼여행을 떠나고 나서, 은월의 자살 소식을 친우들은 듣고 말았다.
**
은월의 자살 소식과 함께 프리드의 결혼식 이후로 2년이 흘렀다. 아란은 프리드에게 편지를 이젠 전해주어야 할 것만 같아 프리드를 따로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리고 아기를 안은 프리드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2년 새에 아이 엄마가 된 프리드를 마주한 아란이 입을 열었다.
"이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2년 전 은월이 전해 달라 했던 편지."
아기띠를 한 상태였기에 프리드는 아무런 무리 없이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 편지 안에는 특유의 필체로 적힌 내용이 빼곡이 적혀있었고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프리드는 아무런 사실을 모른 채 말했다.
"조금 있다 은월에게 고맙다고 전화라도 해야겠어."
"………."
프리드의 말에 아란은 아무런 말도 없다가 이내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은월, 죽었어."
아란의 말에 프리드는 말도 안된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말도 안돼… 장난치지 마, 은월이 죽었을 리가 없잖아."
"…2년 전 네 결혼식이 있던 날 죽었어. 아니 자살했어."
"장난하지 말고… 은월이 죽을 리가 없잖아!!"
아란은 여전히 덤덤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프리드를 지나치기 전, 마지막이 될 말을 했다.
"프리드 넌, 그만큼 은월에게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겠지. 죽은 사실조차 모르는걸 보면."
아란이 계산을 하고 카페를 나서자 프리드는 울었다. 아기를 꼭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어째서인지 2년 전과 같이 카페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안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몰라서 미안해 은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