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이 없는 밤이었다. 나의 발걸음은 의식 없이 검은 하늘을 떠돌았다. 특별한 약속도 할 일도 떠오르지 않는 축축한 밤이었다. 나는 기지개를 펴며 무얼 할지 고민하다 코트를 걸치고 길거리로 나섰다. 남은 밤을 마저 흘려 보내기에 썩 나쁘지 않은 술집이 근처에 있었다. 구름을 세며 걷던 나는 이윽고 좁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평소와 달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꺼냈던 손을 다시 코트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고 발을 돌렸다. 오늘은 아무래도 때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아니, 이번에는 놓칠 수 없어.
별이 없는 밤이었다. 나는 코트를 걸치고 길거리로 나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평소 즐겨 찾던 술집으로 향했다. 감성에 젖어들기 쉬운 밤이었다. 취한 채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무리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돈만 없어지지 않았어도 더 마실 수 있었다고 투덜대는 목소리들이 요란스럽게 멀어져 갔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좁은 문을 통과했다. 안은 한적했지만 아직 치워지지 않은 테이블 위의 술병들이 방금 전까지 꽤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나는 스탠드 의자 위에 걸터 앉았다. 바텐더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바에 흐르는 음악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 나에게서 한 칸 떨어져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으시군요. 방금 전까지는 꽤나 어수선해서.
......다행이네요. 그랬으면 안 왔을 텐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듯이.
가끔은 조용한 게 끌리곤 하죠.
남자는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기대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떤 색인지 형용하기 어려운 그의 눈동자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어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자리를 비웠던 바텐더가 돌아오고 나는 늘 그래왔듯이 눈인사로 주문을 대신했다. 얼마 안 있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한 모금의 칵테일이 만족스럽게 온 몸에 퍼졌다. 여전히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낯설었다. 첫만남의 어색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랜 공백 끝에 재회했을 때 흐르는 위화감에 더 가까운 듯한? 여전히 왜인지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에 자리를 옮길까 고민하던 바로 그 순간 뒤쪽에서 우당탕, 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쓰레기통을 들어 옮기던 종업원이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 사이에 섞여 있는 지갑을 주웠다.
흠…...아가씨에게 썩 어울리는 디자인은 아닌데.
네? 아…...이건 원래부터 버려져 있던 거에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쓰레기통 안에 다른 종류의 지갑이 몇 개 더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팬텀, 이제 그만 놔주지 그래요. 그러다 다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제서야 나는 아직도 종업원의 손을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웃음과 함께 그녀를 놓아 주었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고 서 있었다. 나는 쓰레기통을 바로 세우고 지갑을 그 안에 다시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었다.
......이봐.
남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통성명을 했던가?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또 실수했네. 너는 쉽지 않구나, 정말로.
나는 자리에 없는 바텐더를 기다렸다.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가 내 쪽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같이 한 잔 해도 괜찮을까요.
음?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그는 웃고 있었다.
*
너는 나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시 한 번 깊게 입을 맞추었다. 애태우는 듯 느릿한 키스 끝에 너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살며시 웃었다. 나는 너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안고 너의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프리드.
응?
네가 나오는 꿈을 꿨어.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에 있었다. 그곳은 때로는 바다였고 숲이었으며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도시 한가운데이기도 했다. 우리는 다른 머리색을 하고 다른 얼굴을 한 채 서로를 지나쳐 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순간 하나하나마다 너는 나를 찾아내었다. 언제나 바다로 흘러드는 수만 가지의 냇물처럼 나의 끝에는 항상 네가 있었다.
예뻤어?
나는 피식 웃었다. 현실처럼 몽롱한 꿈이었던가, 꿈처럼 선명한 현실이던가. 언젠가부터 아침에 눈을 뜨고 별이 없는 새벽 속에 잠들 때까지 나의 정신은 동굴의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데자뷰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몽롱한 혼돈 위에서 너는 언제나처럼 완벽한 장소와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말과 몸짓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일까? 착각일까?
언제나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언젠가는 꺼냈을지 모른다. 너를 의심하고 진실을 캐묻고 마침내 너에게서 도망쳤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던, 지금보다 밝은 색의 머리를 한 너를 꿈속에서 보았다. 울음소리가 그치자 세계는 즉시 무너져 내렸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 너는 붉게 물든 눈으로 중얼거렸다. 한 번. 다시 한 번만 더.
다행이네.
너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진다. 나는 가만히 너의 눈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어렴풋이 깨닫는다.
너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
설령 내가 두 눈을 가리고 영원히 너의 품에 안기더라도 이 세계는 또 한 번 너의 의심에 뿌리부터 갉아먹혀 스러지게 될 것이다.
너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갑작스레 나를 덮쳤다. 익숙한 감각. 그러나 분명 겪은 적 없는 일. 또 한 번의 데자뷰.
피곤하지. 한 숨 자.
다시 눈을 뜨면 이 기억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사랑해, 팬텀. 정말로......
감기약을 먹은 듯한 세계에는, 지쳐 울고 있는 네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