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그래, 결국 우리는 어느 상황에선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선택의 기로 앞에, 담담할 사람이 몇일지는 모르겠다. 조금을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한 사람의 시간 마법사도, 사람들에게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존재도, 오닉스 드래곤들의 왕이라 불리는 존재와 계약을 하고, 선택을 위해 작전을 수립하고, 동료들을 통솔하는 리더의 자리에 앉아있을 때, 그 순간의 선택에 달린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덜덜 몸을 떨어버린다. 이를 꽉 물고, 숨을 들이켜고, 이내 선택을 하는 순간, 흘러가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은 흐르기 시작하고, 주변은 모두 변화한다. 덜덜 떤 순간이 무색하게도, 주사위는 굴려졌기 때문에, 흐르는 시간은 속절없이 손 틈새를 빠져나가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숨통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택을 한 후엔 미련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시간에 갉아 먹힌 숨결이 아까워 눈물 흘릴 시간은 이젠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에, 지나왔던 숨결들에 애도를 표하며 울어 달래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나왔던 어느 마을에서 산 꽤 두께 있는 노트에 몇 자 끄적끄적, 그렇게나마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마음을 떠내어 적다 보면, 창밖의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눈에 띈다. 하늘빛이라고 부르면 우리는 은연중에 옅은 푸른 빛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렇게 하늘을 보고 있자면, 하늘색이라는 말은, 정말 옳은 걸까. 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옅은 푸른 빛도, 지금 타오르는 붉은 하늘빛도, 그리고,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프리드."

 

  나의 계약자. 나의 반쪽, 나의 연인, 아프리엔. 네 밤하늘과도 같은 짙은 남색을 지닌 비늘이 머리카락의 색으로 올라앉고, 별처럼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할 때면, 내 안의 하늘색은 너의 색이라고 정의해보곤 한다. 너는 내게 말을 건네며, 나에게로 저벅, 저벅, 걸어온다. 다가오는 너는 나에게 있어서 안식처이자, 내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내 모든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는 내 안의 하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면, 너는 나를 뒤에서 끌어 안아온다. 스르륵, 옷깃을 스치는 소리에 이어 밤의 장막과도 같은 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이 모여 내 시야를 가리면, 나는 밤하늘 속에 들어선 것 같다며 편안히 미소 짓는다. 밤하늘은 생각만큼 두려운 곳도 아니며, 생각만큼 차가운 곳도 아니다. 내 밤하늘은, 오늘도 편안하며, 따뜻하다.

 

  "오늘은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면 산책도 나쁘진 않겠다만...."

 

  말 소리가 들려오면, 마치 하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서 기분 좋게 웃어보기도 한다. 하늘 앞에선 한낱 작은 존재일 내 웃는 모습이 별에 닿을 때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늘도 웃어 보인다. 웃어주는 하늘의 모습은, 의외라고 해야 할 지,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답다. 그 입술의 곡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면, 내 얼굴에는 꽃이 피어난다. 볼을 물들이는 붉은색에 하늘의 기분이 좋아진 듯, 볼에 하늘이 닿아 왔다가, 다시 멀어진다. 그리고는 이내 하늘에게 안기게 된다. 하늘의 팔이 어깨를 타고 넘어와 목을 감싸 안고, 등 뒤로 따스함이 전해져 오는 그 순간, 나는 하늘에 몸을 띄워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얻는다. 차분해지고, 먼 곳을 내다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생각을 정리하며, 이내 선택의 기로에서도 잘게 떨지 않을 용기를 얻는다.

 

  "날이 추운데, 그래도 밖으로 나갈 텐가?"

 

  산책은 빼놓을 수 없으니까, 라고 말을 되돌려주면 이내 한숨을 잠시 쉬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져온 모포를 나의 어깨에 둘러메 준다. 말을 줄이는 모습에서 걱정해 주는 것도, 그럼에도 결국 선택지를 나에게 넘겨주는 모습에서도, 꼼꼼하게 모포를 둘러주는 네 손길에서도, 결국 그 안에 스민 행동이 뜻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쁘다고 말해주면, 너는 뭐라고 대답을 해 올까. 궁금하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마, 너라면 내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라는 핑계 하에, 내뱉지 못할 진심을 오늘도 꾹, 눌러 담는다. 이 말을 내뱉는 것이 부끄러워서는 아니다. 다만, 내 흐트러진 사고의 흐름이 너 하나로 온전히 집중되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는 나를 너에게 내보임으로써, 나를 사랑하고 있는 네게 나 자신을 또 하나의 짐으로 만들어버릴 그 순간이 두렵기에, 오늘도 나는 내 진심을 꾸욱, 내려 앉히고는 너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시린 겨울 공기를 갈라, 마주 잡은 두 손에선 언제나 나의 따뜻함을 바라는 하늘의 마음이 반영된 보온 마법이 걸려있었다. 내 하늘은, 언제나 내가 추워할까 봐, 혹은 더위에 먹혀들어 고생하진 않을까. 연구만 계속하다 내 몸이 상하진 않을까. 이래저래, 내 하늘은 나를 언제나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사실 시간 마법사라고는 해도, 다른 마법을 다룰 줄 모르는 건 아니다. 보온이라던가, 보랭이라던가. 다만, 네가 내 곁에 자리하는 그 순간, 널 향한 내 애정의 온도계는 100℃를 가리키며 보글보글 끓어올라, 내 몸을 따뜻하게 데워 나가기 때문에,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마법을 쓰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말하지 않는다. 이 순간의 감각은 조금 더 오래 유지되었으면, 하는 조금의 욕심이기에.

 

  "아프리엔, 오늘도 따뜻하네. 보온 마법 걸었구나."

 

  서서히 날이 풀려가며 만물이 움직일 시기가 되어가고 있다. 이 시기엔 일교차가 심한 만큼 인간의 면역력이 약해지는 시기이니, 당연히 이 저녁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 부분인데, 너는 스스로 몸을 소중히 하려는 의지가 보이질 않아. 프리드, 그러다가 인간들은 감기에 걸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들렸던 마을에서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그러더군. 너도 인간이니 해당이겠지, 그러니 조금은 따뜻하게 하고 다녀라. 너는 네 몸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는 게 좋아. 괜찮아, 아프리엔. 감기에 걸릴 정도로 안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한걸.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온통 내 걱정을 한 보따리 가지고 사는 것인지. 그 들렸던 마을이라는 핑계는 언제까지 댈 것인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지겹게 들릴 법도 하건만. 그럼에도 나를 걱정하는 너를 바라볼 때마다, 어두운 밤하늘 뒤로 찾아올, 네 속에서 발견한 따스한 봄 햇살에 시선을 두게 된다. 그리고 이내 웃는다. 네가 가져다주는 그 모든 행동 깊은 곳엔 추운 겨울을 버텨내느라 고생했다며, 이젠 따뜻한 꽃의 향기를 내게 달라는 듯, 너는 햇살을 한껏 머금고 있다. 그 많은 햇살이 혹여나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조심스레, 조심스럽게. 조금씩 풀어내면, 햇살은 곧게, 내게 쏟아져 내려온다. 작은 나에게 그 햇살이 무한한 애정을 실어 맞닿아오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싹을 틔워내고, 꽃을 피우며, 봄 향기를 뿌리고 다닌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내 하늘은, 눈 앞에 펼쳐진 모습처럼. 언제나 나를 향하고 있으니,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 너는 나의 하늘이다. 네 속에선 별도 있고, 어두운 밤하늘도 있으며, 해도 있다. 내가 네게 무엇을 보답할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은, 고작 작은 꽃향기들로 네가 만들어준 세상을 가득 메울 뿐이다. 하지만, 오늘도 하늘은, 나를 좋아해 준다. 그런 하늘을, 오늘도 나는 사랑한다.

 

  있지, 아프리엔.

  나도 사랑한다, 프리드.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나는 밤하늘 속에 몸을 누인다.

bottom of page